몸값을 치르시는 예수님
3월 11일, 수요일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인간의 죄와 악 그리고 이것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받아들이고, 몇 일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수용입니다. 이 수용에는 사람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인간의 죄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을 전제할 때 가능함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창으로 찌르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며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그분의 태도에 예수님의 비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관점일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 순간부터 계시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은 날로 번성하기 보다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자유와 죄로 인해 없는 것처럼 되어 가게 되었습니다. 정의롭고 공의로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잘못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시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빚을 예로들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이고, 그에 짓눌려 살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에 충실하시며, 당신의 말씀을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당신이 약속한 축복과 생명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인간이고 구원을 계획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당신 자비의 뜻을 구현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파견하시고요. 예수님의 지상 과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고, 이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의 죄와 악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고,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께 온전히 순명하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아주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고 많은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에 관한 진술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진술들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하느님의 빛안에서 깨달아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빛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 하든 그분께 대한 믿음이라 하든, 이것 없이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을 깨닫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