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i 2020. 2. 15. 22:26


2월 15일, 토요일

칠층산, 토마스 머튼/정진석, 바오로딸, 2016

 

*(하느님을 찾는 마음은) 인간 내면에 새겨져 있는 본성이다. 집을 짓고, 땅을 경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한 부준이 것이다. 사실 이는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열망이다. (53)

* 내 어린 시절은 거의 달마다 생활환경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환경이 바뀌어도 별 불편을 느끼지 않고 그 변화를 쉽게 받아들였으며 이런 생활이 오히려 퍽 가치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모든 것이 항상 변했고 나는 그것을 모두 받아들였다. (64)

* 하느님의 존재를 정확하게 믿은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중에 하느님을 인정하고 경배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하느님께 종속된 인간 본성에 깊이 새겨진 인간의 본질에서 분리 될 수 없다. (81)

*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에서 넘쳐' 우러나온 말이다. 어느 누구라도 말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확신하는 것을 들을 때는 그것이 비록 자기 생각과 반대되더라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되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주의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132)

* 신앙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들조차 나에게 직접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141)

* 그 어둡고 불쾌한 방에 꼼짝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앉아 있자니 갑자기 내가 혼자라는 생각이 사방에서 엄습해 왔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나라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나 자신의 내적 평화나 신념이나 빛이나 깨달음도 없고, 하느님도 없고, 천당도 없고, 은총도 없고, 하여간 아무것도 없다. (166)

열네 살 된 머튼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친척 집 방에서  생각한 것이다.

모든 실재를 순수한 추상 수준으로 격하해서, 이를테면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실체는 그 자체로 본질적 실재가 아니라 세상 어느 구석 큼직한 색인 카드 상자 속에 쳐박혀 있는 어떤 먼 보편 이상적 본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74)

* 진실로 많은 이가 너무나 늦게까지 깨닫지 못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피하려고 애쓸수록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진리다. 상처 입을 것을 두려워하는 만큼 더 작고 더 사소한 것에서조차 괴로움을 당하게 마련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바둥거리는 사람은 결국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지극히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것에서 오는 까닭에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되어버린다. (188)

* 윌리엄 블레이크는 거짓 신심과 거짓으로 독실한 태도, 애덕도 없고, 인간을 하느님과 대면케하는 신앙의 빛과 생명도 없이 다만 형식과 인습만을 가지고 사람의 영혼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짓밞아 버리는 거짓 신심을 용납할 수 없었다. (198)

* 충고란 위선이나 나약함, 또는 야비함이나 두려움의 가면일 다름이다. 그리고 권위는 늙고 약한 자들이 젊고 강한 자들의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느끼는 질투에서 나온 허식일 뿐이다. (210)

* 감각적 욕정과 욕망에 젖은 사람은 추상 이념을 다룰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 순전히 자연적인 것에서조차 상당한 정도의 순결이 있어야 비로소 지성이 형이상학 문제를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명철하게 된다. (213)

*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욕구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욕구는 다른 사람의 욕구와 어긋날 수 있고 따라서 이 욕구는 마땅히 조정되고 조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나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아름다운 신화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231)

* 쾌락에 대한 애착은 그 본성 자체로 자멸하고 좌절로 끝나게 마련이다. (236)

* 자신의 불행을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기회일 수도 있고 지옥의 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드는 문일 수도 있다. 하느님 사랑인 섭리는 지극히 현명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려고 몰두하는 한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책략을 쓰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움 없는 자신들의 무력함이 얼마나 많은 경박함과 슬픔의 원이이 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신다. (272)

* 그해 여름에 대부는 뉴욕에 있는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국 외교관이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내가 대부의 말에 동의하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276)

머튼(18)이 케임브리지 재학 중에 가졌던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대부가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아주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 사회전반 정책이 인간 육체의 모든 신경을 자극하고 인공적 긴장을 최고도로 유지하여 모든 인간 욕구를 극한점까지 죄어서 가능한 한 많은 새로운 욕구와 인공적 욕정을 야기시켜 사람들이 공장과 인쇄소와 영화 제작소의 생산품과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을 마구 사들이도록 하는 그러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291)

* 마크 밴 도런 교수의 질문은 매우 훌륭했다. 그 질문에 좀 더 올바르게 대답하려 노력하다 보면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는 질문을 함으로써 학생들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기술을 갖고 있었다. (303)

* 두려움과 교만과 색욕과는 불가분이다. 이 욕정들은 일시적으로 두려움을 뒤로 숨겨둘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정의 양면일 뿐이다. (349)

***************

 

* 인간존재의 핵심에는 한 가지 역설이 있다. 이를 파악해야 비로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곧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는 자신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전혀 또는 거의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철학과 윤리 수준만 추종한다면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역설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초자연적 생명력을 지향하는 본성을 부여하셨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그 자체의 수준에서는 완성될 수 없고, 오직 인간 능력을 무한히 초월한 수준의 하느님에 의해서만 완성되도록 조성된 것이다. '성화은총'은 인간의 수준을 무한히 초월한 생명과 지성과 사랑의 은혜로 인간의 본성을 완성한다. (357)

* 인간 지성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참다운 앎을 갈망한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아뵙고 싶은 갈망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368)

* 하느님은 각자의 구원을 위해 모두 서로 의존하고 서로의 선과 공동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라신다. (375)

* 문학 강의는 경제학이나 철학, 사회학이나 심리학 강의여서는 안된다. 문학의 소재, 특히 극의 소재는 주로 인간행위, 곧 자유행위, 윤리행위다. 문학.. 시는 불가피하게 인간행위에 대해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작가들은 역사학자나 기타 과학자들과는 다른 질서에 속한다. (379)

* (헉슬리에 따르면) 우리는 악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합당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맹목적이고 잔인하며 영적이지 못한 본성의 물질적.동물적 욕구에 탐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89)

* 영혼의 생명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 곧 인간의 최상급 기능이 동원되는 행위요, 이 사랑으로 모든 노력의 최종 목표인 하느님과 정식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399)

*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최고 경지에 이른 예술가의 체험은 사실상 신비체험과 견줄 수 있는 차원의 것임을 깨달았다. 예술의 기능을 감각적 쾌락을 재생하는 것, 또는 기껏해야 정서를 자극하여 일시적 감흥을 느끼도록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모독에 가까운 것임을 아버지한테 배운 나는 예술은 언제나 관상이요, 인간 최고의 능력행위가 내포된 것이라고 이해했다. (423)

* 나는 이 모든 것을 지성적으로 수락했을 뿐 아니라 마음으로 갈망하게 되었다. 아니 갈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효과적으로 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일치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취하기를 바랐다. 곧 내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께 봉사하기를 바라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 책에서 얻어낸 명료한 개념에 황홀하게 매료된다. 그래서 실천적 지식이 없으면서도 그것을 실제로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427)

* 일상생활에서 지성이 욕망과 욕구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지성은 욕정의 목적과 목표에 의해 항상 눈이 멀고 악용당한다. 육체의 욕구는 온간 종류의 과오와 오판의 원천이다. 이러한 갈망 때문에 우리 지성은 모든 것을 우리 욕구의 기준에 맞도록 왜곡되게 제시한다. (429)

* 나는 그날의 느낌을 앞으로 쉽사리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충동은 "미사에 가라! 미사에 가라!"고 내 안에서 보채는 감미롭고도 강하며 부드럽고도 맑은 충동이었다. 나를 독촉하는 이 목소리, 곧 내가 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일러주는 내적 확신은 정말 신시한 것이었다. 극히 감미롭고도 단순하여 쉽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내가 굴복했을 때, 그 충동은 신이 나서 나를 밀어붙이거나 맹렬하게 덤비지도 않았다. 다만 차분하게 목적이 뚜렷한 방향으로 나를 몰고 갔을 뿐이다. (431)

* 은총을 받지 않는 한, 하느님으로부터 지성과 의지를 움직이는 빛을 받지 않는 한, 산 신앙의 행위를 할 수 없다.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러기에 성부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다가가지 못한다. 영혼에게 은총이 부어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탐욕과 잔인함과 이기심으로 완고해진 의지가 은총을 거부하는 경우에 더욱 완고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437)

* 나라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주장들에서 진실이나 정의를 찾으려는 것은 부질없고 실없는 짓이었다. 세상은 전쟁을 미워한다고 입으로 나불거리면서도 실상은 메스꺼울 정도로 서로 앞다투어 전쟁에 말려들고 있었다. 나는 전쟁은 물론 전쟁을 이끄는 배후의 모든 동기를 증오했다. 그러나 내 호감이나 증오, 또는 찬성이나 불신은 외적 정치 질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나는 한낱 개인일 뿐이고 전쟁에서 개인은 고려되지 않았다. (446)

* 교회의 높고 힘든 이 특수한 성소의 후보자감으로 자처하지 않게 되자, 나는 자연히 의지를 느슨하게 하고 경각심을 풀어 평범한 일상생활 수준에 머무르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나에게는 높은 이상, 어려운 목표가 필요했는데 사제직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474)

* 세례는 나의 모든 자연적 욕구를 하느님 뜻에 종속시킬 의무를 부과했다. '육의 지혜'에 따르면 자연적 욕구가 보통 향하는 것이야말로 인생 전체가 지향해야 할 선이다. 이러한 판단을 따른다면 의지는 불가피하게 하느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방향으로 기운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의지를 우선하게 되는 한 그는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78)

* 나의 지성이 근본적으로 완전하게 개종하였기에 내 개종은 완전한 줄 알았다. 그러나 지성의 개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의지라는 주인'이 완전히 하느님께 예속하지 않는 한, 지성의 개종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 어설픈 것이다. 의지는  지성에게 어떤 대상만을 보도록 강요할 수는 없어도 그 대상을 외면하게 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479)

* 나는 작가.시인.평론가.교수가 되고 싶었다. 내 야망이 목표 삼는 것들은 그 자체로는 괜찮았다. 작가나 시인이 된다는 것이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자기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만 내적 자아의 우상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 작가나 시인이 되고자는 하는 데는 독이 있다. 나는 나 자신과 세상을 위해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쓴 글은 나와 세상이 솟아나온 근원인 욕정과 이기심과 죄와 같은 수준의 것이었다. (480)

* 결과를 원치 않는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라. 원인을 사랑하면서 결과를 무서워하고 결과가 원인을 따라왔을 때 놀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484)

* 나는 인쇄된 나 자신을 보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 명성과 성공, 이것이 내가 진정 믿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눈과 입과 마음속에 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온 세계에 알려지고 칭찬받고자 할 만큼 야심이 큰 것도 아니었다. 특별한 몇몇 사람들에게 진가를 인정받는다는 데 소박한 멋을 느껴 매혹되어 있었다. (490)

*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자연적 행복을 이교도인 그가 도달할 수 있었던 하느님께 대한 지식에 두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신비를 묵상한다 해도 이를 관상하는 태도가 사변적이며 비인격적인 경우에는 실제 결과도 여전히 자연적 수준을 넘지 못한다. (502)

*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가 잇속을 차리는 것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다만 우리가 기도드리기를 바라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우리의 기도가 아쉬운 것을 청하는 기도여서는 안된다는 고집은 일종의 교만이다. (512)

*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영혼으로 만들어 낸 그림이 바로 세계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일반대중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514)

* 나자신을 내던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맹목적이요 돌이킬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일단 떠나면 되돌아보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질문이 나와 대결했다. '너는 정말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가? 원한다면 그렇다고 말하라...' (528)

* "네 저는 사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진심으로 원합니다. 당신 뜻이라면 저를 사제로 만드소서... 저를 사제로 만드소서." (529)

******************

 

* 내가 이 수도회(프란치스코회)를 택한 것은 그 규칙을 어려움없이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이 수도회가 내게 제공할 교수생활과 저작생활, 그리고 내가 장차 살게 될 주위 환경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흔히 이보다 못한 마음의 준비도 수락하시어 그분의 시간에 따라 이를 참된 성소로 만드신다. (596)

* 하느님은 나의 자연적 취향이나 취미나 선택이 옛 습관과 궤도를 완전히 벗어나서 그분의 작업에 따라 곧바로 그분께 가게 되기까지 내 취미나 선택을 원치 않으셨다. 나의 자연적 선택, 신분 선택의 취향은 전혀 믿을 것이 못된다. (596)

* 어느 수도회에 입회하든지 그 규칙이 엄하거나 느슨하거나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성소가 진실로 열매를 맺으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고 참다운 희생이 따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며 자연적 선은 최상의 것일지라도 일절 포기해야 한다. (598)

*  내가 성소에 대해 의논했던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내가 진정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불쑥 깨달았다. 그들은 내 과거를 전혀 모른다. 내가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무서운 문제가 나에게 대결을 해왔다. "에드먼드 신부에게 가서 이 모든 사실을 알려드리자. 그러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606)

  에드먼드 신부는 댄 월시 교수가 머튼에게 소개해준 프란치스코회 신부다. 머튼은 이 신부에게 자기 성소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자기 과거(여자 관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에드먼드 신부는 내 말을 신중하게 들었다. 나는 그에게 내 과거와 내가 겪었던 모든 두통거리를 털어놓았다.. 그는 내가 교회에 들어온 지 2년이 채 못되는 풋내기 개종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했다.. 이튿날 에드먼드 신부는 친절하게도 관구장에게 지원을 재고한다는 편지를 쓰도록 나에게 일러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머리를 숙이고 내 성소의 폐허를 바라볼 뿐이었다. (609)

* 그 호된 시련을 벗어났을 때, 나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얼굴을 가린 두 손바닥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 나는 제대 위에 걸려있는 커다란 석조 십자가와 성체 앞에서 기도했다. 그때 나 자신의 비참 외에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앞으로는 수도성소에 대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611)

* 나는 욕망에 짓눌려 한 걸음 한 걸음 고통스럽게 전진해야 했다. 나는 끈질긴 욕망의 위협과 뼛속까지 사무치는 욕정에 대한 혐오 사이에서 거의 녹초가 되었다. (616)

* 고독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마치 상처가 벌어지듯 내 마음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불씨를 깨끗이 꺼버리려고 애쓰면서 도서관을 나왔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나는 성소도 없고 수도자도 사제도 될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결정적으로 그렇다는 말을 이미 듣지 않았던가? 또다시 머리를 두들겨 맞아야 믿겠다는 말인가? (649)

* 수도생활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과연 환상인지 아닌지를 밝혀 내야만 한다는 것이 풀리지 않은 응어리로 남아 있었으나 옛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그 위로 또다시 채찍을 맞을까 봐 온몸이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거린 희망 없는 내적 투쟁을 하면서 성주간을 보냈다. (670)

* 세상 논리에서는 이웃보다 앞으로 튀어 나와 이웃의 주의를 끄는 사람이 가장 출중한 자가 되기 때문에 제각기 자기를 다른 사람 앞에 내세우려고 한다. 수도자들은 세속을 떠나 숨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온갖 완전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일치함으로써 그들의 인격과 개성이 진정한 영적질서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674)

* 피정 지도신부가 말했다. "여러분, (십자가의 길 기도) 14처에서 청원한 기도는 절대로 거절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겟세마니 수도원을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제14처에서 트라피스트회 수도자가 되는 성소의 은총을 주시기를 간청했다. (677)

* "여보게, (마크 교수)가 그 점에 대해 잘 아는 분께 의논했더니 자네가 성소가 없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그 사실이 바로 자네한테 성소가 있다는 징표일지도 모른다는 것일세."  나는 수도성소가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더는 거론할 필요조차도 없다고 여겨왔는데 이러한 내 생각에 거센 반발이 일고 있었다.  반발이 얼마나 거세던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735)

* 필로테오 신부 방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용감히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갔으나 그의 방문 앞 1미터쯤 되는 거리까지 갔을 때 마치 누군가가 내 어깨를 꽉 붙잡아 세우는 것 같았다. 어떤 것이 내 의지를 꽉 눌렀다. 걸으려고 했으나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었다. 필시 마귀일지도 모른다 싶어 그 장애물을 떠밀어 보다가 뒤돌아서서 그곳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739)

마크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보나벤뚜라 대학교에서 철학 강의를 하고 있는 필로테오 신부와 상의하거 가기 전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 내가 필로테오 신부에게 모든 주저와 의문을 몽땅 털어놓자, 필로테오 신부는 내가 수도원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기를 바라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741)

* 신기한 노릇이었다. 갈수록 수도원에서 살고 싶은 소망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고 그 한 가지 생각만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평정한 마음과 내적 평화 역시 점점 커지고 있었다. (749)

* 수도원은 행복하게 되는 법을 하느님한테 배우는 학교다.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의 행복과 무한한 자유와 완벽한 사랑의 완성에 참여하는데 있다. (753)

* 수련장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그러나 여태까지 내 양심에 얹혀 있던 꺼림칙한 큰 짐, 곧 개종 전의 생활 태도와 아울러 이 때문에 한때는 사제 성소를 단념하게까지 되었다는 사정을 이 착한 트라피스트인에게 몽땅 털어놓기가 쑥스러웠다. 그러나 급기야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줄이고 줄여 단 몇 마디로 간추려 실토해 버렸다. 수련장은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할말을 모조리 실토한 솔직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원장님과 의논해 보겠다고 말했다. (762)

* 수도자의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러 오시는 베들레헴이다. (767)

* 인상 깊었던 전례에서 한 몸처럼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였던 공동체가 직접 참여해서 관찰해 보니 이제는 구성원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서 좋은 점과 나쁜 점, 유쾌한 점과 불쾌한 점이 일일이 눈에 뛰었다. 이것이 수도성소의 가장 중요한 면이요, 수도 생활에서 가장 먼저 부딪치는 시련이 될 수 있다. (770)

* 얼마나 많은 영혼이 자네가 이 수도원에 항구히 머물러 있는 데 달려 있는지 아는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많은 이가 자네가 성소에 충실할 때 비로소 구원되도록 마련하셨다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유혹이 들면 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네. 앞으로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걸세. 그러면 자네에게 딸린 그 영혼들을 기억해야 하네. 그중에는 자네가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네가 천국에서 만날 때까지 알지 못할 사람이 대부분일 걸세. 하여간에 자네는 여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네..." (775)

토마스 머튼에게 고해사제가 한 훈계의 말이다.

* 나는 글쓰는 본능을 고스란히 수도원 안으로 갖고 들어왔고 또 이 사실을 의식했다. 이것은 밀수입한 것이 아니었다. 수련장 신부는 내가 수련원에서 머리에 떠오른 시와 감상문 등 여러가지를 쓰고 싶어했을 때 이를 승인했을 뿐 아니라 고무하기까지 했다. (787)

* 동생은 추상적 진리를 찾아내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말을 꺼내자 동생은 마음속에 숨어 있는 갈망때문에 겟세마니로 왔다는 것이 그의 눈에 역력히 드러났다. 확실히 동생은 나만 보기 위해서 온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화와 구원과 참행복에 대해 끝없는 갈망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799)

* 나는 신앙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신앙의 은총으로 하느님을 만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질은 인간의 감관이나 이성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까닭에 어둠속에서 하느님의 실재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은 이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데 아무런 힘도 들지 않게 한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계시하는 분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801)

*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때 텅 비어 있는 가대석에서 뚝 떨어져 있는 신자석 끝에 동생이 제복을 입고 혼자 무릎을 굻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있는 신자석과 내가 있는 가대석 사이에는 자물쇠가 걸린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다고 동생에게 소리를 질러 손님 숙소를 빙 돌아서 오는 긴 길을 설명해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손짓 신호를 했지만 동생은 알아채지 못했다. (804)

* 차가 큰길로 들어서는 모퉁이를 돌아갈 때, 존 폴이 뒤를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동생은 우리 두 형제가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고 나도 그랬다. (805)

* 영국에 가 있는 존 폴한테서 편지가 왔다. 1943년도 그해 부활은 전례적으로 가장 늦은 425일이었다부활절 월요일에 동생의 편지를 뜯어보았더니 동생은 계획대로 결혼식을 올려 아내를 데리고 한 주간쯤 영국 호수에서 신혼여행을 보냈고, 그 다음 새 기지로 배속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고 했다. 오후에 가능한 한 동생의 기분을 다소라도 돋워주려고 애쓰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810)

* 화요일 교중미사에 참례하러 가대에 있는데 수련장 신부가 원장신부님께 가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원장님은 내 동생 존 폴 머튼이 417일 작전 중에 실종되었다는 전보를 읽어주었다. 몇 일이 지나자 확인 편지가 왔고, 두어 주간이 지난 다음에는 마침내 존 폴이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어 왔다. 사건 내용은 간단했다. 16일 금요일 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동생과 동료 탑승원이 만하임 목표로 폭격기를 타고 이륙했다.  비행기는 북해에 추락했다. 존 폴은 추락 때 중상을 입었으나 바다에 떠 있으려고 노력했고 이미 죽은 조종사를 부축하려고까지 했다. 그의 동료들이 간신히 고무 보트를 띄워 그를 건져냈다. 동생은 매우 심하게 부상당했다. 목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동생은 고무 보트 바닥에 누운 채로 헛소리를 했다. 극도로 목이 탄 그는 계속 물을 달라고 했으나 그들한테는 물이 없었다. 추락 때 물탱크가 파괴되어 한 방울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오래 지탱하지 못했고, 세 시간 동안 목말라 하다가 주었다. 그의 동료들은 갈증의 고통을 더 받았으나 마침내 구출되어 생환했다. 그러나 그때는 닷새 후였다. 넷째 날 그들은 존 폴을 바다에 수장했다. (812)

* 그리운  아우야

내가 잠이 들지 못하면

나의 눈은 너의 무덤을 덮은 꽃.

내가 빵을 먹을 수 없다면

나의 단식은

네 죽은 자리의 버들가지 되어 살리라.

무더위 속에 내 갈증을 풀 물을 찾지 못하면

내 갈증은 가련한 여행자

너를 위한 샘이 되리라.

 

어디에

연기 자욱하고 황폐한 땅 어디에

네 가엾은 몸이 죽어 버려져 있느냐?

처절한 재난의 살풍경 속 어디에

너의 불행한 얼이 길 잃고 헤맸더냐?

내 노동 안에 와서 안식처를 찾으렴

내 슬픔 속에 와서 네 머리를 누이려무나

차라리 내 삶과 내 피를 팔아

너를 위한 푹신한 침대를 사거라

내 숨결과 죽음을 팔아

너를 위한 영원한 안식을 사거라

 

전쟁터의 모든 이가 사살되고

군대의 깃발이 먼지 속에 쓰러질 때

네 십자가와 내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말하리라.

그리스도께서 너와 나를 위해

우리 각자를 위해

이 땅에서 죽으셨다고.

 

4월의 조난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해되시고

내 봄의 폐허 속에

그리스도께서 슬피 우신다

그 눈물의 보화가 뿌려져

벗 없어 가냘픈 네 손에 들어가

너를 네 땅으로 도로 사오리라

그 눈물의 침묵이 뿌려져

네 낯선 무덤 위에 종을 치리라

듣고 오너라, 그 종소리

너를 본향으로 부르고 있으니. (812-814)

*******************

 

*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은 영원이다. 당신 자신한테서 영원히 탄생하신 하느님의 제2위이시되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다또한 그분은 순간순간 우리 마음에 탄생하신다.  영원무궁한 탄생, 당신 자신을 떠나거나 유일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당신 자신한테서 탄생하시는 하느님의 영원무궁한 시작,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다. (818)

* 1945년 성 바오로 개종 축일에 원장 신부님한테 지도를 받으로 갔다. 나는 그 문제(글쓰기)를 생각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분이 느닷없이 명령했다. "앞으로 계속 시를 쓰시오." (829)

덕행과 극기와 애덕의 실천과 같은 활동생활은 관상의 준비다. 관상은 활동을 중지하고 신비스러운 내적 고독으로 물러나 쉼을 뜻한다. 이 내적 고독 속에서 영혼은 하느님의 무한히 창조적인 침묵 속에 흡수되어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창조적 사랑으로 하느님의 완전성에 이르는 비결을 다소 배우는 것이다. (834)

* 신분이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완덕의 정상에 오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841)

* 어떤 의미로 우리는 언제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긴 여행이다. 우리는 현세에서 하느님께 완전히 소유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둠속에서 여행하고 있다그러나 은총에 의해 하느님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 제가 이미 도착한 당신 안에서 저는 당신을 찾기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저의 하느님, 다른 이는 아무도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여쭐 수 있는 이는 오직 당신 뿐입니다. (842)

* 저는 서원할 무렵, 관상수도자란 누구인가, 관상수도자의 성소란 무엇인가, 제 성소는 무엇이며 시토회 성소는 어떤 것인가는 따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서원을 한 다음에는 다른 이들을 따라서 분부받는 일을 하기만 하면 다른 것은 차차 알게 되리라고 믿었을 뿐입니다. (845)

* 책은 끝났으되 탐구는 끝나지 않았노라. (849)

*****************

글을 쓰려면 우선 쓸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어 작문을 가르치려면 묘사하고자 하는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런데 책을 읽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별도의 문학 강좌가 없다면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여 책을 읽는 법이나 적어도 책에 흥미를 갖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563)

****책에 대한 흥미를 갖고, 책을 읽으면서 책읽기를 스스로 습득하고 다른 사람을부터 배우고, 이 과정에서 외적인 상황에 내적인 상태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매우고, 이것을 적절한 구조로 배열하고 내용들이 상호 탄탄한 관계속에서 확장되고 심화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자와 작가와 교수로 살기를 바랐던 머튼이 말하는 글쓰기의 과정이다. 칠층산은 토마스 머튼을 작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했고, 영적인 저술가로서 발전하고 도약할 수 있게 해 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