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글/생활 속에서

헝클어진 실타래

leibi 2020. 2. 10. 10:19

2월 10일, 월요일


악이란?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꼬드기는 것입니다. '사람답다'는 것은? 너무 광범위해서 간단히 말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입니다. 생각나는 것을 떠오르는대로 적어봅니다.


피조물로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감각적인 피조물은 모두 소멸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한계 지어져 있습니다. 한계지어졌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상태를 뛰어넘는다는 것 뿐입니다. 초월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이 항상 피조물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할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시공간에 한계지어진 상태에서 과거를 보고 미래를 예측할 뿐입니다. 다른 것과의 관계맺음이 필연적입니다. 자기 아닌 상대방을배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내적인 생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람(답다)'에 대해 단층적으로 말 할 수 없습니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지만 단층적으로 말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최소한 현재 상태는. 사람, 인간에 대한 의견이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악'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입니까? 성경이나 성경신학 사전, 가톨릭 사전에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피해가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적어봅니다.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일까요? 이렇게 말한다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악한 것을 만드신 것이 되어 모순입니다. 악마저도 선한 것이라 말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까요? 인간의 고통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악의 유혹으로 죄를 짓고, 죄의 결과가 고통이라면 그 무자비한 고통과 고통으로 인한 인간 존재가 위협받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의 정점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죽음에 대해 뭐라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죄는 무엇일까요? 악의 유혹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죄의 죄의 결과는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죄의 결과가 고통이라 하는데, 죄를 짓는 순간 고통속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되겠네요. 죄를 짓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심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이런 결과가 생길 것입니다. 양심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는 곳입니다. 하느님 영에 의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 형성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후천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치유와 회복이 가능하고, 구제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왜곡하거나 외면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통은 자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나게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자기가 물질적인 존재임을 처절하게 깨닫는 때입니다. 고통은 모두 물질적인 것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느끼도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정신만의 해방도 아니고 영적인 자유만도 아님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시지프스가 있습니다. 산 위의 바위와 함께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사람입니다. 계곡에서 다시 정상으로 바위를 밀고 가야만 하고, 정상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다시 계곡으로 떨어집니다. 바위와 함께 굴러떨어지고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만 하는 운면에 처해진 사람입니다.


사람의 삶과 관련된 것, 신앙과 관련된 것과 씨름하며 사는 사람들의 전형일 것입니다. 엉긴 실타래를 풀었는가 싶은 순간 다시 헝클어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깊고 깊은 웅덩이를 파야하지만 어떤 순간 파내려왔던 웅덩이가 무너져 내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웅덩이와 관련된 생각이 납니다. 깊이 100미터의 웅덩이를 파야 할 때, 주변 100미터를 파면서 100미터 깊이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넓이 1미터 내외의 깊이로 100미터 까지 파내려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후자의 경우는 엄청안 내공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이저 빔으로 하늘을 비출 때 생각해 보십시요. 실처럼 가느다란 불빛이지만 그 그 빛이 몇 킬로미터 밖까지 나갑니다.


'내공'. 무협소설에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무술을 얼마나 수련했는지, 그 수련의 결과로 내적인 힘과 에너지가 얼마나 강한지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은 삶에 대해서,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말 할 때 끌어다 쓸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앙에 대한 내공이 깊을 때, 악과 죄와 인간의 고통과 자유와 해방과 구원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풀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자기만이라도 이해시켜야 할 것입니다. 자기도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믿음으로 밀고 나가라고 말한다면 정신의 게으름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