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요 저녁반
12월 15일, 일요일
수요 저녁반 마포학습관에서 7명이 만나다. 지난 2500년 전부터 세계 각처에서 읽히고 상연되고 있는 안티고네를 핑크색 책표지가 연극대본 같아서 그리스 신화와 비극이 무대에 올려지는 것 같은 친근감을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소포클레스는 신 중심적세계관을 대변하는 안티고네로 만들었는데, 장 아누이는 인간 중심적가치관을 대변하는 크레온에 중점을 둔 듯하다. 자신의 신념을 절대화하여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이상적 정의와 현실적 윤리문제로 죽은오빠에 대한 혈연적 의무를 신성한의무라고 확신하는 안티고네. 타협과 절충을 통한 인간적 일상을 최고의 가치로 보며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최우선 주장하는 국가지상주의, 시체 매장유무는 죽은 당사자에게는 아무상관이 없고 그러한 처벌이 허례인 줄은 알지만 크레온은 법의 무서움 국가질서를 위해 안티고네를 죽일 수밖 없다. 왕의 직무는 권력의 상징 이 아니라 매일 수행해야 하는 노동자의 일과 같은 것으로, 맡은 임무를 완수할 수 밖에 없는 일상의 작은행복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은 우리 사회와 정치, 그리고 문화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삼을 것인가? 우리도 20대에는 <임마뉴엘 칸트>의 원칙주의. 원리주의에 입각해서 이상적 정의와 윤리문제, 인간에 대한 고결한 존엄성을 주장하며 불의와 맞서 싸워었다. 그러나 지금 나이 먹은 우리는, <존스튜어트 밀>의 '선이란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온다' 는 실용주의, 현실적인 크레온의 주장이 더 설득력있다.
경비병의 무관심은 지금 우리들의 정치무관심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정치는 백성을 위한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왕쟁탈전과 사람죽음을 정치에 이용하는 2500년 전에 이야기가 지금도 계속 자행되고 있음에 안티고네의 용기가 더 필요한 현대일까? 죽기전에 왜 자신 죽는것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죽음이 의미없고 부조리한 일임을 깨닫는 장면은 우리의 죽음에 마지막 순간 절망을 안고 죽지 않기 위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하신 예수님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크레온은 죽음을 기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누구에게나 확실한 순간, 정해진 순간을 기다리기 시작할 것임을 알리고 있다. (최 마리아 막달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