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함
12월 1일, 일요일
강의 할 때 질문을 자주 합니다. 질문을 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난이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쉬운 것이나 너무 어려운 것을 답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 생각해야만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 좋습니다. 질문을 받고 응답을 해야 하는 사람의 관심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부드러운 분위기여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친밀감이 형성되 있어야 합니다.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호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심사숙고하여 질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어른들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뭅니다. 학생들은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강의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몇 일 전에 강의할 때 이러저러한 것에 대해 물어볼테니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처음 듣는다는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지 모르지만 심기가 매우 불편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예,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관심이 없다는 그런 태도였습니다. 아주 당황했습니다. 실망이라기 보다는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익명이 아니라 자기라는 신분이 그러나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자기 표현을 한다는 것은 자기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이익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합니다.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는 민원을 제기합니다. 그것 뿐입니다. 서로 대화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의견을 수정하는 마음의 여유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안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오랫동안 수직관계로 생활해 왔던 결과입니다. 산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요새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과 담을 쌓고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교류하는 것이 없는 인간관계처럼 삭막한 것이 없습니다. 관심사가 전혀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따분한 것도 없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 대화처럼 답답한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말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고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에 들어오셨던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하느님, 자기 신앙, 자기 생각을 말하지않고 타인의 의견과 생각과 믿음에 대해 듣는 것만으로는 참되고 깊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이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수직관계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격려하고 끈기있게 기다리는 것에서부터 교회의 변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어른의 신앙생활로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