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한 철학적 이해
9월 2일, 일요일
I. 무거운 주제, 고통과 철학
* 자매들이 남편으로부터, 남자 친구로부터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가 있다.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이다.
*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있다. 고통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들도 있다.
일한다, 공부한다 등의 말이 있을 것이고, 여기에 ‘철학’이라는 말도 포함된다.
* “고통에 대한 철학적 이해”, ‘골치 아프다’.
고통에 대한 것이 골치 아프다는 것인지, 철학이라는 말이 골치 아프다는 것인지, * 왜 골치 아픈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는가?
1. 고통의 보편성
* 모든 인간은 고통을 당한다.
* 성경을 ‘고통에 관한 책’이라고도 하는데,
구약성경에만도 사람의 고통에 관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 욥기 “사람이란 여인에게서 난 몸, 수명은 짧고 혼란만 가득합니다.
꽃처럼 솟아났다 시들고 그림자처럼 사라져 오래가지 못합니다”(욥 14, 1-2).
*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
“(고통이라는) 주제는 땅 위의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따라다니고 있는 보편적인 주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세상에서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것이며, 끊임 없이 재고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구원에 이르는 고통』, 2)라고 했다.
* 홍보용 전단지: “사람은 고통을 당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형태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고통으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인간의 고통에 대한 성찰이 고통을 극복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고통 에 대한 이런 성찰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넓게 하고, 높 게 하여, ‘고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다.”
2.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는 철학
* 철학, 인간과 인간의 삶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학문이다.
* 철학사, 가장 멀리 있는 것에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였고 가장 가까운 것, 즉 인 간과 철학하는 자신에 대해서는 가장 늦게 성찰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 매일의 삶에 있어서 가장 절실한 문제인 고통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는 사실 이다. 무슨 이유인가?
* 근대의 학문의 주된 관심사 두 가지 것,
하나는 구체적인 경험의 대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밝혀 보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 논리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죽음, 내세, 사랑, 미움, 기쁨, 질투, 고통 등이 그런 주제들이다.
* 이들은 종교나 문학, 예술의 문제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철학적 사색의 대상이 될 자격은 없다는 것이다.
*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해방 될 수 없으면 고통의 의미라도 알아서 위로받는 것이다.
* 그것을 돕는 것이 철학의 임무요, 철학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자비이다.
* 손봉호 교수는 “철학은 삶의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철학자들도 그렇게 자처하고 있다. ... 그런데 삶에 있어서 고통만큼 중요하고 심각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만약 고통 외에 심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심각하고 중요한가? 우리가 무엇이 중요하다고 판단할 때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는가? 고통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데 직접 혹은 간접으로 전혀 공헌하지 못하는 것들이 정말 심각하고 중요할 수 있는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죽음보다 더 심각한 고통에 대해서 철학이 무관심하다면 이는 철학의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철학은 지금 당장 겪고 있는 고통을 줄여 주지는 못하지만 고통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나중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위로를 제공할 수는 있다.
II. 고통의 특징
1. 의심할 수 없는 고통
* 데가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나는 아파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 철학자 스캐리는 “아픔을 느끼는 것은 확실성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우리는 어떤 일이 꿈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기 살을 꼬집어 본다.
아픔을 느끼면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심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인다.
*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자신의 활동에 대한 인식이 있기 훨씬 전부터 고통을
경험하고, 그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2. 정의하기 어려운 고통
* 국어사전에서는 고통을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한다.
* 인터넷 <네이버 어학사전>에서는 “몸과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정의한다.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피부나 신체의 아픔을 느끼는 감각인 통각(痛覺)에 의한 불쾌감정과 구별되는 생리학· 철학적 용어로 행위주체의 감각(pathos) 또는 감정의 극단적인 불쾌감을 말한다. 고통은 슬픔·욕구불만·갈등 등의 상태로 표현되고, 대부분 심리적 원인에서 생긴다.”
* <위키 백과>에서는 고통(苦痛)은 “실제적· 잠재적인 조직 손상 또는 피해, 악영향 등으로 서술될 수 있는 불쾌한 감각적·감정적 경험을 말한다”라고 한다.
* <국제 고통학회>에서는 “신체적 조직의 실제적 혹은 가능한 파손과 관계하여 겪는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 혹은 그러한 파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서술되는 불쾌한 감각적, 정서적 경험”이라고 했다.
* 이것을 통해서 고통에 대해 정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는 ‘마치 송곳 끝으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칼로 뼈를 깎는 듯한’ 등으로 표현하여 아픔을 일으키는 행위 혹은 도구와 그 행 위가 상처를 입히는 신체의 부위 등을 이용하여 설명할 수 밖에 없다.
* 우리말에서는 ‘아픔 痛’과 ‘괴로움 苦’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다.
* 두 가지가 엄격하게 구별되어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 사람은 단순히 ‘아파’할 뿐만 아니라 짐승들과 달리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 일반적으로 괴로움은 정신적인 것이고 아픔은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 아픔이 더 구체적이고 기본적이기에 아픔이 고통의 전형이다.
3. 사적(私的)인 고통
* 고통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철저히 사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 고통은 자체로 항상 외로운 것이다.
* 고통은 원초적인 것이며, 사적이요, 주관적인 것이어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 “고통은 주관적인 경험이요, 주관성의 원형일 것이다. 고통은 우리 개별적 마음의 외로움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모리스는 지적한다.
* 고통은 고통을 통해서 그 실체에 조금씩 다가갈 수 밖에 없다.
* 고통은 그 자체가 외로울 뿐 아니라 고통 당하는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 스물여섯 된 아들을 졸지에 잃고 어떤 수녀원에 잠시 머물렀던 박완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래, 나는 주님과 한 번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고, 혼자 돼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애걸해서 안되면 따지고 덤비고 쥐어뜯고 사생결단을 하라리. 나는 방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몸부림을 쳤다. 방안은 헤매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마침내 하나의 작은 돌맹이가 되었다. 돌맹이처럼 보잘 것 없었고, 돌맹이처럼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돌맹이가 말랑말랑해지려고 기를 쓰듯이 한 말씀을 얻어내려고 기를 썼다. 돌맹이가 말랑말랑해질 이 없듯이 한 말씀은 새벽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절한 밤이었다.”
4. 나를 의식하게 하는 고통
* 이런 처절한 고통은 ‘나’를 인식하게 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
* 헤겔은 “고통을 통하여 사람은 자신의 주체성을 느낀다”라고 하였다.
*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 쓰지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나’가 있는 것이다.
* 고통을 당할 때 ‘나’는 다른 사람과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나는 어른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들이야 나름대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저주를 받을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아이들... 이 아이들은 무슨 이유로 하느님의, 앞으로 오게 될 천국을 위한 밑거룸이 되어야 한단 말이냐? 나에게는 이 입장권이 도대체 너무 비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입장권을 취소하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 욥은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하던 그 밤도 사라져버려라... 내가 어찌 하여 모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으며,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는가? 어찌하여 나를 받을 무릎이 있었고, 어찌하여 내가 빨 젖이 있었던가?”(욥 3, 11-12)라고 절규한다.
5. 고통의 수동성과 능동성
* 사람은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선택한다. 그러나 고통은 ‘당하는’ 것이다.
* 고통을 인식한다는 것도 ‘아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는 것’이다.
* 고통은 인간을 세계안으로 끌어내리며,
그가 창조자가 아니라 한갓 피조물임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한다.
* “고통은 실로 주관적인 성격과 수동적인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고 있을 때에도 인간 자신이 고통의 원인일 때에도, 이 고통은 여전히 그 형이상학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수동적인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구원에 이르는 고통』, 14).
* 인간이 고통을 당한다 하여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는 말은 아니다.
* 고통은 쾌락보다 우리를 행동으로 이끈다.
* 인간에게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영원히 사유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따져보는 경우는 그 ‘어떤 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될 때이다. 이런 면에서 고통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III. 고통과 인간의 역사
1. 고통과 인간 공동체
* 인간 고통의 상당한 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가해지며,
고통에 대한 반응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고통의 이런 특징 때문에 고통이 지니는 공동체성과 사회성에 대해서 말한다.
* 인류가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 고통이 없었다면 사람은 지금보다 더 악해지고 더 개인주의적이 되었을 것이다.
*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고통을 주지는 않지만,
고통을 일으킬 만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에 대해서 동정한다는 것은 그와 같이 고통당한다는 것이요,
내가 고통 당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과 같이 아파하고 괴로워할 수는 없는 것이다.
*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
다른 사람과 함께 아파하려 하지 않은 사람의 인간관계는 피상적일 뿐이다.
* 그런 사회에서는 더 큰 쾌락을 위한 끝없는 경쟁이 지배할 게 될 것이다.
* 고통이 지니는 사회성 때문에 ‘내가’ 당하는 고통에 대한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 현대인에게는 고통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
평등사상이 팽배하고, 하느님을 대신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2. 문화 창조의 원동력인 고통
* 고통은 문화창조의 원동력이다.
* 인간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동기에는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동기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 토인비가 우리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하는데,
‘고통과 극복’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된다.
* 이것은 문화를 유희(재미)에서 찾는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 문화에 대해서 ‘그저 재미 삼아 한 번 해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쉽지 않다.
* 문화 창조에서 유희와 고통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 만약 인간에게 유희의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짐승처럼 고통을
단순히 당하고만 있을 뿐 문화의 수단으로 그것을 극복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고통은 그 자체의 제거와 완화를 요구함으로써 문화 창조의 원동력을 제공하고, 그것을 유희할 수 있는 여유가 문화라는 통로로 발현한다고 할 수 있다.
3. 고통과 인간의 역사
*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거나 그 이유가 자명하지 않을 때 우리는 ‘왜 내가 이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나?’와 같은 질문을 수없이 하게 된다.
* 고통의 원인보다는 목적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 그것 때문에 고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미있는 논쟁을 하려는 사람들은 구체적 인 일상 경험을 훨씬 넘어선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고통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역사의 합리성에 대한 물음과 연결된다.
*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두 가지 가능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첫째는 고통이 전혀 우연적인 것이고 어떤 합리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그것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고통의 이유가 설명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곧 역사가 무의미하지 않 다는 결론과 연결되어 있다.
* 이런 관점에서 ‘더 큰 선을 가져 오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이 악을 허락하셨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 가장 완전하고 합리적인 신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과 고통이 있는 역사의 비합리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 역사 발전에 있어서는 악과 고통이 의미를 가질 수 있으나 개개인의 고통이 반드시 그 개인에게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통과 더불어 인간의 역사가 진행된다.
IV. 구원에 이르는 고통
* 고통은 신비이다.
*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인 고통이 신비로 남아있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영원한 신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고통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에서 종교적인 차원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
* 합리적인 설명과 이해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더 잘 극복할 수 있다.
* 박완서는 “하느님은 제 아무리 독한 저주에도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제 자신 속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러기 위해 아무한테나 응석부리고 싶은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구원에로 이끄는 고통’이라고 했다.
“고통은 그것이 세상의 구원 사업이라는 하느님의 신비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초자연적’이요, 그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있으므로 깊이 ‘인간적’이다”(『구원에 이르는 고통』, 31)라고 하셨다.
* 인간의 고통,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는 고통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 고통은 깊은 학문적인 연구나 성찰을 통해 깨닫게 되는 주제는 아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그 실체를 조끔씩 깨달아 간다.
* 이 시간 후의 강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수수께 끼가 풀린다”라는 말씀에 따라, 고난회원들이 만나고 있는 일상의 구체적인 고통 을 살펴보면서, 그 고통이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수용 되며 극복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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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솔, 서울, 1994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서울대학교 출판부, 서울, 1998
요하네스 브란첸, 고통이라는 걸림돌, 성 바오로 출판사, 서울, 1990
요한 바오로 2세, 구원에 이르는 고통, 한국천주교 중앙 협의회, 서울, 1989